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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사진에 사이비 관계자 나와 구설수에 오르더니..” 30대 난소암 말기 판정 받고, 길거리 도매상에게 무시당하며 살았다는 ‘여가수’

김준식 기자

양희은 근황

최근 가수 양희은의 어머니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이들이 함께 슬픔을 나누기도 했었는데요.

지난 18일 양희은은 자신의 SNS를 통해 어머니와 생전에 함께 찍은 사진을 공유하면서 다시한번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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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엄마가 떠나시고 난 후 ‘사무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며 “마음 속으로 엄마께 많은 얘기를 하며 기댈 곳도 울타리도 없이 살아온 모든 이들의 삶을 우러르게 됐다”고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 했죠. 그러면서 양희은이 지내왔던 인생사가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지금부터 그녀의 삶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양희은이 가수가 된 ‘이유’

서울특별시에서 1952년 8월 13일에 태어난 양희은은 청소년 시절 서울 YMCA의 청소년 쉼터인 ‘청개구리’에서 중요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김민기는 그녀의 음악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김민기가 아니었다면 양희은의 음악적 길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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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아버지는 육군 대령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가정의 재정적 어려움이 이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양장점이 화재로 인해 모두 타버리면서 집안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로 인해 대학 시절 양희은은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으며, 심지어 걸어다니며 생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생계를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가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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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은 송창식의 도움으로 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송창식은 명동의 맥주집에서 자신의 공연 시간 일부를 양희은을 세우며 그녀가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양희은은 가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첫 정규 앨범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은 1971년 9월에 발매되었으며, 김민기의 ‘아침 이슬’과 ‘세노야’ 같은 곡들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금지곡 리스트에 오르기도..

꽃길만 될것 같았던 그녀의 음악 인생는 당시 유행이었던 음악 금지령에 의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아침 이슬’이 금지곡이 되면서 그녀의 다른 노래들도 금지곡이 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당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이유 없이 금지되었고, ‘작은 연못’은 정치적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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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많은 노래들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75년에 대한민국 가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70년대 후반에는 이주원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한 사람’, ‘들길 따라서’, ‘네 꿈을 펼쳐라’ 등과 같은 주옥같은 곡들을 선보였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비보, 길거리 상에게 무시를 받기도…

1981년, 양희은은 한국을 떠나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며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1982년에 난소암 진단을 받으며 삶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암과의 싸움에서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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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의 여동생, 양희경은 언니의 병간호를 직접 했으며, 당시의 힘든 상황을 회상하며 언니의 생사를 걱정했던 순간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녀는 결국 가수의 삶을 은퇴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은퇴를 한 양희은을 세상은 가만히 두질 않았습니다.

당시, 양희은은 청계천에서 자신의 앨범이 비상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한 음반 도매상이 ‘양희은 난소암 판정, 전집 판매’라는 현수막을 걸고 그녀의 앨범을 판매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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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BN

이를 알게 된 양희은은 깊은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도매상은 ‘억울하면 신곡을 발표하라’고 맞받아쳤고, 이에 양희은은 결국 ‘하얀 목련’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고 합니다. ‘하얀 목련’은 원래 다른 가수에게 주려고 만든 곡이었지만 거절당한 후에 양희은에게 오게 되었고, 그녀는 새로운 가사를 붙여서 발표해 히트곡으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양희은은 남편과 반려견과의 삶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후 지금의 양희은이 있기까지…

음악적으로도 양희은은 중요한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1985년에는 하덕규가 작곡한 ‘한계령’을 발표했으며, 이 곡은 무거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큰 평가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음반사의 홍보 부족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1990년 재발표 시에는 많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노래의 제목은 연작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마지막 편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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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BS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1987년에 양희은의 금지곡들은 해금되었고, 그녀는 뛰어난 뮤지션으로 다시 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에는 데뷔 3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음반과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2011년에는 40주년을 맞아 그녀의 인생을 돌아보는 뮤지컬 ‘어디만큼 왔나’를 공연했습니다.

양희은의 음악적 업적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녀의 첫 앨범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과 20주년 기념앨범 ‘양희은 1991’은 각각 85위와 80위로 선정되며 그녀의 음악적 영향력을 입증했습니다.

지금의 양희은이 있기까지 정말 다사다난한 삶이었던것 같습니다. 모친을 떠나보낸 슬픔은 어쩔수 없지만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수많은 양희은님의 팬들을 위해 살아있는 나날들 속에서 좋은 음악으로 남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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